AUTOBIOGRAPHY

박서보 자서전

- 박서보가 말하고 이용이 쓰다 -

10. ‘反국전’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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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反국전’ 선언

최초의 ‘미술실기대회’

 대학을 졸업했어도 군(軍) 문제 때문에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다. 굳이 취직하려면 자리는 더러 있었지만 미술교사만큼은 싫었다. 그 길로 들어서면 학생들과 평생 씨름하며 살지 않을까 지레 두려웠다. 그림 그리는 시간을 턱없이 빼앗기면서까지 교단에 설 수는 없었다. 나는 하루 종일 그림만 생각하며 살고 싶었다. 6·25 전쟁을 겪고 난 이후 미술에 대한 나의 생활태도는 그렇게 크게 바뀌어 있었다. 가장 쉽고 편하게 택할 수 있는 것이 시간강사였다. 그림 그리는 시간을 크게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적은 돈이나마 생활에 보탤 수 있어 좋았다. 

 서울 종로구 내수동(內需洞)의 보인(輔仁)중·상고, 필운동(弼雲洞)의 배화(培花)여고에 시간강사를 나갔다. 내가 홍릉 살 때 김창열이 서울예고에 학과장으로 간다며 자신이 근무하던 제기동(祭基洞)의 정화(貞和)여자중·상고 미술교사에 나를 추천했다. 그땐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였다. 노는 것 보다는 조금이라도 생활에 보탬이 되지 않겠느냐는 창열의 생각이었다. 처음엔 별 뜻 없었지만 친구가 진심으로 애써주는 것이 고마워 가기로 했다. 교장·교감 선생님이 인터뷰를 마치고 나자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시간강사가 아닌 전임을 제안했다. 정화는 재정이 열악해 줄곧 시간강사만 썼다. 전뢰진(田礌鎭, 1929- , 조소)이나 김창열을 비롯해 모든 미술교사가 시간강사였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며 이런저런 핑계를 댔다. 학교 측에서는 적극적이었다. 전용 연구실을 만들어 주겠다는 파격 제안이 나왔다. 아침 직원회의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었고, 밤새 그림 그리다가 다소 늦게 출근하는 것까지 이해하고 배려했다. 결국 정식 미술교사가 되었다. 그런 학교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석 달 만에 《세계청년화가회의  파리 대회》에 한국의 전권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파리로 떠나게 되었다. 융숭한 환송식까지 받았다. 월급의 절반 정도를 아내에게 보너스로 지급했다. 3개월 후에 돌아오마고 떠났으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본의 아니게 1년 가까이 체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55년경 명동에서


 배화에 시간강사로 나갈 때였다. 거긴 고암(顧庵) 이응노(李應魯, 1904-1989, 한국화)의 부인 박인경(朴仁景, 1926- , 한국화)이 미술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 분은 나같이 젊은 남자 선생의 도움이 필요했다. 박 선생은 나의 군대 관련 사항을 학교 측에 그대로 보고했다. 학교 서무실이나 경리 담당자는 내가 어떻게 해서 도망병이 되었는지 사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한번은 군 기피·미필자 색출 합동단속반이 학교에 들이닥쳤다. 단속의 홍역을 막 치른 학교에서 “단속반이 지금 배화로 간다”고 전화로 알려줬다. 그 사이 직원들은 내 출근부를 찢어버렸고, 나는 창문을 열고 도망쳤다. 스릴러 영화에 나옴 직한 이런 신(scene)은 이후에도 도처에 숨겨져 불쑥불쑥 등장한다. 나의 《도망병》 시절이다.

 학교가 나를 적극 보호하려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바로 직전 해인 1955년 9월 숙명여고(淑明女高)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와 함께 제1회 《국제아동미술전》을 열어 히트를 쳤다. 접수된 작품만 1,500 점에 이르렀다. 대한미술협회의 실력자였던 도상봉(都相鳳, 1902-1977, 서양화)을 비롯한 15명의 심사위원이 이틀간 심사했다. 《동아일보》가 매일 주요 작품 화보를 연재할 만큼 언론의 주목도가 높았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팔십 노구에도 전시를 관람했다. 《국전》 《미협전》 《서울미대전》 《홍대미술전》 등과 함께 그 해를 ‘찬란하게 장식한’ 전람회의 하나로 꼽은 신문도 있었다. 

 1956년 배화여중·고는 2년 뒤 개교 6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숙명여고의 《국제아동미술전》에 과 겨룰만한 미술행사를 열고 싶어 했다. 나는 숙명과 같은 운영방식에 반대했다. 그건 아동의 그림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아동이 그린 그림이 미술선생이나 주변의 손을 타면서 그림이 바뀌게 된다. 그런 그림을 접수받아 심사하는 것이 숙명과 같은 미술전이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예전 과거시험처럼 시험장(科場)에서 직접 써 낸 답안을 심사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자. 철 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배화의 교사(校舍)·교정(校庭)을 직접 그려내도록 하자. 그게 진짜 실력이다. 함께 온 선생님이나 부모님은 아동들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편안하게 쉬면서 대기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해주자. 바르게 하면 학교 홍보는 저절로 된다.

 그때 실기대회라는 용어를 처음 썼다. 《동아일보》는 해방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자라나는 아동들의 창작능력을 계발하고 심미의식을 향상시켜 학교미술 진흥에 이바지 한다는 논리였다. (1956년 9월17일자) 

 그해 9월 열린 배화여고 주최 《전국 아동 미술실기대회》는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이듬해인 1957년엔 배화와 숙명의 미술대회의 성공에 고무되어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한 미술전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하지만 미술전 대부분은 실기대회로 진행됐다. 미술실기대회의 효시가 된 셈이다. 실기대회는 지금도 전국적으로 붐을 이루고 있다.

 나는 용기를 얻어 모교 홍익대(弘益大)에 건의해 58년부터 중·고교생 대상 미술실기대회를 열도록 했다. 서라벌예대, 서울대, 이화여대(梨花女大)도 실기대회 행렬에 동참했다. 신흥대(新興大, 현 慶熙大)도 미술과 최덕휴(崔德休, 1922-1998, 서양화) 교수가 종전의 미술전을 뒷날 실기대회로 바꾸었다. 교육 및 미술 관련 단체와 협회에서도 다투어 실기대회를 열었다. 

 나는 바르지 못한 일에는 끝까지 반대하고 싸우는 성격이었다. 비단 미술실기대회뿐 아니다. 이른바 프로 화가들이 여는 전람회도 그렇다. 화수회 행사처럼 모여 꾸미는, 하나마나한 전람회를 극도로 싫어하고 반대했다. 공모전은 말해 무엇 하랴. 관전인 《국전》도 마찬가지다. 돌아보면 그림 그리는 일 외에 지나치게 힘을 소진한 것은 아닌가 생각도 들지만, 내가 아니면 누가 그런 일을 하랴 생각하며 위안을 삼는다. 배화에는 오래 근무하지 않았다.  시어머니처럼 참견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불필요한 간섭을 싫어나는 내 체질상 맞지 않았다. 미술전도 성공한 마당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1955.09.14 동아일보 4면 생활/문화기사 (칼럼/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