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박서보: 오늘도 맑음 / 이진주

GIZI
2022-02-21

[ 박서보: 오늘도 맑음 ] 이진주 작가의 두 번째 박서보 인터뷰를 싣습니다.


Photo by INAE

여전했다. 8월 11일, 코로나 이후 두번째 맞은 여름의 한가운데, 그는 여전한 모습으로 거기 있었다. 분홍색 셔츠에 보라색 커다란 자수정 목걸이를 걸고,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전날 방영된 TV 다큐멘터리(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EBS, <예술의 쓸모>) 덕분에 내내 전화기가 울렸다. 그는 큐레이터 케이트 림의 표현대로 “백 점 맞은 시험지를 자랑하는 어린아이처럼” 이번에도 순정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다”는 기쁨이 아니라,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을 기억하고 자신과 연결되고 있다는 기쁨이었다. 정든 친구들은 이미 많이들 세상을 떠났다.

이 다큐멘터리는 세대와 장르를 초월한 네 명의 예술가들을 수개월 동안 추적해서 3부작으로 묶은 것이다. 최연장자인 1931년생 박서보 화백과 가장 어린 소설가 1984년생 정세랑 작가 사이에는 63년이라는 세월이 있다. 박서보 한 사람을 원탑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서 그의 오랜 팬들이 당황했다고 한다. 그는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다.

“그게 요즘 편집 감각이라는 거여. 한 사람만 몇 시간씩 쭉 나와 봐. 그런 꼰대를 누가 보나. 비빔밥처럼 엮어 놓으니 재미있지. 젊은 사람들이 참 잘해. 우린 못 따라가요. 그냥 즐겨.”

박서보에게는 변화가 천성이다. 그런데 또 한결같이 우직한 데가 있다. 이를테면 매일 조금씩 변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어느새 출발점과는 영 다른 지점에 와있는 모양새다. 그래선지 그의 곁에는 늘 젊은이들이 모인다. 전후 세대부터 MZ 세대까지, 70년을 한결같이 컨템포러리한 작가로 여겨지는 데에는 이런 융통성이 큰 몫을 했다.

“30대에 아들 낳아 놓고 애기 이쁘다고 궁둥이 때리고 똥 닦아주던 시대하고, 다 성장해서 수염 난 어른이 된 지금하고는 완전히 다르거든. 아들이 자라고, 아들을 보는 나도 늙어서 관점이 달라져요.

당장 일차적 자연이 계절마다 변하고, 이차적 자연이라고 할 만한 인공물들도 휙휙 바뀌어요. 거리에 나가보면, ‘아이고, 이게 언제 생겼나’ 싶은 전혀 못보던 것들이 들어서 있다고. ‘잘해놨구나, 멋있구나’ 하는 것들, 쇼윈도에 때때로 변하는 것들을 보면서, 시대 감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직감하는 거지. 나도 그에 맞춰 달라지는 거고. 그러니까 천지만물이 다 내 선생이에요.”


90년째 새소년

일반적으로 아흔이 넘은 이에게는 뒷방에 머무르며 후배들에게 덕담이나 한 말씀 해주시길 기대한다. 그런데 박서보에게는 현역 작가로서 다음 10년의 계획을 묻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에게는 나이를 묻는 일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다. 산뜻한 분홍색을 챙겨 입고 인터뷰에 나선 소년에게 아무래도 좀 미안스럽다는 생각 같은 거다. 그건 참 이상한 현상이다. 생전의 스티브 잡스가 그랬다더니, 그의 앞에 있으면 강력한 시간 왜곡장이 생겨나는 것 같다.

그는 오늘 그려야 하는 그림들과 내일 챙겨야 하는 사람들로 여전히 바쁘다. 당장 내년 4월 베니스 비엔날레에 맞춰 영국 화이트큐브 갤러리가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산마르코 광장 옆 퀘르니 스탐팔리아 재단(Fondazione Querini Stampalia) 특별전이다. 이탈리아의 유서 깊은 퀘르니 스탐팔리아 가문 소유 궁전(Palazzo Querini Stampalia)의 3층 전시장 전부를 박서보가 채워야 한다. 영화로웠던 옛 궁전과 현대의 기술이 만나, 다녀온 이들마다 베니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기를 주저하지 않는 곳이다. 리노베이션의 모범인 곳에서 자기 혁신의 귀재인 노화가는 또 보여줄 것이 있어야 한다.

그에 앞서 올 가을엔 프랑스의 샤토 라 코스테(Château La Coste)에서 코로나로 미루고 미루던 전시를 한다. 샤토 라 코스테는 평판 좋은 와인을 생산하는 명문 와이너리인 동시에, ‘건축물들의 지성소(a sanctuary of architecture)’라는 별명을 가진 아름다운 갤러리와 압도적인 현대미술 소장품으로도 유명하다. 프랭크 게리, 장 누벨, 렌조 피아노, 리처드 로저스, 그리고 안도 타다오(Frank Gehry, Jean Nouvel, Renzo Piano, Richard Rogers and Tadao Ando) 같은 거장들이 라 코스테의 드넓은 장원에 세상 어디에도 없었던 건물들을 지었다. 영국 하이테크 건축의 대가, 리처드 로저스 경(b.1933)은 빨간 프레임이 돋보이는 파빌리온을 보탰다. 박서보 말마따나 “공중에 뜬 것 같은” 신기한 건물이다. 박서보전이 열리는 곳이 바로 거기다.

“건축가가 나보다 두 살 아래인데 벌써 은퇴를 한대요. 아, 이보슈. 나는 어쩌라고. 전시 오픈 날, 건축가 가족들도 다 모인다면서, 내가 좀 와 줬으면 하더라고. 그런데 우리 손자가 아직 백신을 못 맞았고, 며느리도 한 번만(1차만) 맞아서 갈 수가 없겠어.”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다. 올봄 화이트큐브 버몬시 갤러리에서 열렸던 개인전과 같이 중요한 해외전시에도 영상만 실어 보낸 터다. 가을까지 이렇게 갇혀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렸다. 남아있는 시간을 알 수 없기에, 그에게는 한 번의 봄, 한 번의 가을이 얼마나 아까운지 모른다. 화이트큐브는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단색화 특별전에서 박서보를 발견한 이래, 벌써 네 차례나 성대한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8월 22일, 주인공 없이 열린 샤토 라코스테의 프리 오프닝 디너에는, 갤러리 페로탕 대표가 대신 참석했다. 그는 박서보에게 보내는 영상 메시지와 사진을 여러 장 찍어 보냈다.

“이곳은 정말 마술적인 공간입니다. 선생님 작품과도 꼭 어울리고요. 모두가 감탄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부재가 너무나 안타깝지만, 걱정마세요. 저희가 여기 있으니까요!”

이 메시지를 한국어로 보내고 싶어서, 그는 부러 한국인 통역과 동행했다. 그렇다. 박서보는 전세계 탑 갤러리와 미술관들이 이토록이나 사랑하는 거장인 것이다. 전쟁고아나 다름없던 맨발의 소년은, 어느새 돈도 권력도 명예도 다 가져본 아흔 살 어른이 되었다. 그러나 분홍색 티셔츠를 입은 이 소년에게는 다른 그 무엇보다 사랑이 귀하다. “내년에는 꼭 가봐야겄구나” 하며 의지를 다지는 것도 그 까닭이다.

아무래도 유럽까지는 너무 먼 아시아의 팬들에게도 기쁜 소식이 있다.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를 포함해 미술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함께 해왔던 국제 갤러리가 10년만의 개인전을 준비한 것. 거기에서야말로, 박서보의 현존을 느껴볼만 하겠다. 아무리 버추얼 시대라고 해도, 인간의 육체가 존재하는 한, 물질로서의 사람과 물질로서의 그림을 실제로 보고 만지고 느끼는 체험은 다른 것이 대신하기 어렵다.

그가 내준 아이폰 메모장에는 평생의 친구 고 김창열 화백과 찍은 사진들이 ‘저장된 사진’으로 담겨있다. 밤중에 일어나 몇 시간이고 들여다보며, “창열아…” 부른다는 사진이다. 그와 함께 “2022.4.19-11.27 Fondazione Querini Stampalia” “2021.8.22-12.19 Château La Coste Richard Rongers Pavillion” “2021.9.15-10.31 국제갤러리” “8월분 대한항공 마일리지 OO” 같은 정보들도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매년 수첩 몇 개를 작히나 아작냈던 메모광 박서보에게, 그 작은 모바일 메모장이야말로 죽음과 삶, 추억과 미래가 교차하는 현장이겠다. 코로나 때문에 속도는 더디지만, 그의 세계는 꿋꿋이 굴러가는 중이다. 백신은 진작 맞아 뒀다. 부작용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언제나 과학을 믿었으니까.


Photo by Park Seungho

묘법이라는 텅 빈 세계

1967년 첫 작품 이래, 묘법을 지속해온지도 50년이 넘었다. Myobop이라는 한국어로도, Eriture라는 불어로도 알려져 있는 박서보의 시그니처다. 우리말 묘법은 그리는 법과 쓰는 법이라는 의미를 함께 가진다. 애초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근간이 그림인 동시에 글자인 한자였고, 문인화의 기초에서는 쓰는 법이 곧 그리는 법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불어 에크리튀르는 쓴다는 의미다. 단색화라는 용어가 그러하듯이 에크리튀르 역시 묘법이라는 실재와 꼭 들어맞느냐는 논란이 있어왔지만, 묘법을 세계적으로 번역하고 알리는 데 기여해온 것은 사실이다. 어차피 언어란 자꾸만 진실로부터 “미끄러지는” 것이다. 더구나 공이니, 선이니, 도니 하는 동양의 정신적인 개념들은 도무지 서양의 언어로 온전히 설명할 길이 없다.

나카무라 유스케나 이일로부터 박서보를 이해하고자 했던 많은 평론가들이 “쓰는 것과 그리는 것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경지”며, “그림으로써 그리지 않는 세계”나, “감춤으로써 마침내 드러나는 진실”을 여러 가지 언어로 설명하고 해석하고 상찬해 왔다. 55년 가까이 지속해온 미술세계에 대한 질문은 새삼스럽기도 하고, 반복적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늘 나오는 질문에 늘 나오는 답변을 짐작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조금, 톤이 달랐다.

“묘법은 쓴다는 의미인데, 그린다는 의미도 있고, 그런데 그걸 50년 넘게 해왔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사실 나는 부족함도 너무 많고, 넘침도 너무 많아. 스스로 그걸 조절을 못해요. 나 자신도 그렇고 다른 사람도 나를 대하기 너무 어렵다는 걸 내 스스로가 알기 때문에, 그걸 어떡하면 서로가 균형을 잡도록 맹그느냐 하는 것이 평생의 과제였어요.”

요컨대 쓴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 그린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 쓰는 건지 그리는 건지 구분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 그저 스스로를 가다듬어 자신 안의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했다는 거다.

“나는 디오니소스가 아폴롱보다 훨씬 강했던 사람이라, 50:50 균형을 맞추려고 무척 애를 썼다고. 그 중심점에 있는 게 사실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일인데, 거기서 균형을 잡자니까 매일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처음부터 묘법이라는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려고 작정하고 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기를 단련하는 과정에서 생긴 나머지가 묘법이라는 작품이 되었다는 것. 50년에 걸친 수신의 결과, 사리처럼 쌓인 물질들에게 정신화된 이름을 붙여준 것이 묘법이라는 것.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묘법도 아니고, 단색화도 아니에요.”

연필로 집요하게 그어댄 선을 통해 ‘아무것도 없음’을 공들여 보여준 전기 묘법에 이어, 후기 묘법에는 색깔의 전면적인 활용과 더불어, 수직의 선과 수직 수평을 넘나드는 네모난 사각형의 공간, 흘러내린 물방울 같은 건축적 요소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후기 묘법이 그려내는 것도 결국 ‘아무것도 없음’이다. 다만, 전기 묘법이 난해하고 이지적인 선비의 문인화였다면, 후기 묘법은 누구나 단박에 이해할 수 있는 색의 언어를 빌려왔을 뿐.

“한강변 밤섬 바로 앞 8층 아파트에 살았어요. 작업하는 방에 들어가면, 여의도의 불 켜진 창들이 보였다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때는 모두가 밤새워 일했거든. 그 불빛들이 도시를 지키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숨구멍이랄까.”

한강 다리도, 고층 빌딩의 야경도, 건물의 계단들도,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기막힌 제주 풍광도 그의 그림 속에 변형돼 담겼다. 성산동 집에서 출퇴근 길에 보았던 성미산 개나리와 제주 유채꽃의 노랑도 오묘한 색감을 재해석해 살려냈다.

“옛날엔 자연이 아름다운 줄 모르고, 그래, 너 노라냐, 그러고 말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어떤 화가의 그림보다 훨씬 위대하다는 걸 알게 된 거지. 나는 화면으로 자연의 색을 유인하려고 했어요. 단순히 보고 베끼거나 자연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유인하고 초대하는 거에요.”

계기는 나이 일흔에 처음 가본 단풍놀이였다. 단풍만을 보러 따로 시간을 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단풍의 시뻘건 색은 일종의 충격요법처럼 박서보의 마음으로 쳐들어왔다. 내가 최고라는 오만을 부수고, 검은색과 흰색이라는 아집을 녹여내면서.

화면 위에서 종이와 씨름하는 동안에만 자신이 비워지는 줄로 알았더니, 작가가 아닌 일상의 사람들도 꽃놀이, 단풍놀이와 같은 리추얼을 통해 스스로를 비워내고 있었다. 스님처럼, 선비처럼 자신의 안쪽을 파고드는 것만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 거대한 자연 앞에 서서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 역시 일종의 자기수양이었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거기 있었다. 세상은 결국 아무것도 없음으로 돌아가지만, 바로 그러하기에 매일의 일상이 소중한 것이었다. 나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현생에 이 몸을 받아 태어난 동안에는 업을 씻고 닦으며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색은 공이었다. 공은 다시 색이었다.

궁극적으로 무와 공, 허를 가르치고자 하는 불교에서도, 그러하기에 화려한 단청이나 탱화로서 중생들에게 깨달음을 주고자 했던 거다. 원래도 색에 민감했던 박서보는 흑(앵포르멜)과 백(초기 묘법)의 시절을 지나오는 동안, 오래 잊고 있었던 색을 찾았다.

“유성 물감은 자기가 눈으로 보고 개어 쓰면 바로 그 색인데, 수성 물감은 물이 말라봐야 알아요. 그걸로 오묘한 색을 만든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야. 그래도 학생 때부터 선생들이 색감이 뛰어나다 칭찬했어요.

도상봉 선생은 내가 반국전 운동을 하는 걸 보고는 완전히 사상을 오해하셔서 ‘저 빨갱이놈, 빨갱이짓만 안하면 좋겠는데.’ 그러면서도, 늘 ‘자네만큼 흰색 잘 쓰는 작가가 없다’고 하셨다고.”

그런 감수성과 관찰력, 끈기와 집념들이 어우러진 결과, ‘개나리색’, ‘진달래색’, ‘홍시색’ 같은 박서보의 색깔들이 태어났다.

“그 때 동행했던 동경화랑 사장에게 내가 말했어요. ‘저 색을 반드시 회화로 가져오겠소.’라고. ‘쉽지 않으실 걸요.’ 하더라만, 나중에는 ‘역시 해내셨구만요.’ 그러더라고요.”


Photo by Kim Kyungbum

장인과 예술가

한 사람의 집요한 예술가이자, 달항아리와 벼루와 불상과 만년필과 귀갑 안경과 알보석 반지와 빈티지 샤넬과 모든 아름다운 물건들을 애호하는 컬렉터로서, 장인에 대한 존중과 믿음은 뿌리 깊다. 예술가인 자신과 장인의 작업에 어떤 차이와 공통점이 있느냐는 질문에, 거장 소리를 듣는 이 작가는 단언한다.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다른 작가였다면 혹 발끈할 법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왜.

“장인적 수행과 나의 행위는 거의 같아요. 다만 장인들은 물건을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지만, 나는 그 수행을 통해 나를 비워내는 거지. 장인은 물건을 더 편리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내기 위해 존재합니다. 장인들보다 예술가인 ‘내가 더 우월하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건 오만이죠.”

그는 조선시대 장인의 달항아리를 특히 사랑한다.

“선비들이 ‘문자향 서권기’ 충만한 문인화를 통해 달성한 경지에, 도공들은 배우지 않고도 가 닿을 수 있었거든요.”

어쩌면 박서보는 초기 묘법에서 달항아리의 희끄무레하고 둥글넓적한 중도의 미, 모호의 미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달성해버렸을지도 모른다. 비밀은 무아지경으로 그저 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한국미’ ‘전통미’의 계승과 창조라는 것도 그렇다.

“예전 어느 시대 어느 환경에서 성공했던 하나의 미학을 단순히 지금 가져온다고 해서, 전통을 계승하고 한국의 미를 되살리는 게 아닙니다. 조선시대 달항아리의 모양을 21세기 현대사회에 똑같이 재생한다고 그게 똑같아지나요? 한국인으로서 한국문화에 푹 빠져 체화하고 있다가, 모르는 사이에 내 개성에 녹여내는 것이 진정한 한국미이고, 전통의 재발견이지.”

같은 주장을 박서보는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해왔다. 원형질 탐색을 마치고 유전질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 시도했던 때다. 색동이고, 무속이고, 오방색이고, 무엇이든 그에게 흡수되었다가 그림으로 재해석돼 나왔다. 작가 본인과 아내 윤명숙(에세이스트), 둘째 아들 박승(기지재단 이사장)의 실루엣에 색동띠를 두른 작품 등이 이 때 등장했다. 하지만 무엇이고 제 성에 차지는 않았다.

조앤 기 같은 미술사학자는 한국 컨템포러리 미술의 시작과도 같았던 앵포르멜 작품 <회화 No.1> 이후 묘법에 이르기까지 박서보의 긴 실험의 과정에서, 원형질 시대보다 오히려 유전질 시대를 더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화가 자신은 “유전질 시대는 부끄러운 실패기”라는 인식을 한동안 품고 있었다.

앵포르멜과 원형질의 검은색, 어머니의 아궁이에서 덜 타고 남은 진득한 송진과도 같은 무정형의 형상들을 통해 전후 한국사회의 물질적, 정신적 폐허를 고발했다면, 유전질 시대의 형형색색은 그 폐허를 딛고 일어난 한국인들이, 일제강점기와 동족상잔을 겪은 부끄러운 과거가 아니라 자랑스런 흔적을 역사로부터 소환하고 다시 단단한 현실을 재건하고자 했던 시도였다.

이런 바탕 위에서 비로소 충분히 녹여낸 달항아리의 색, 조선인의 “발효된” 흰색을 초기 묘법에 살려낼 수 있었다. 흰색은 현대미술운동의 이론적 동반자 이일 선생이 일찍이 해설한 바, 단지 그냥 색이 아니라 “생성하고 표현하는 정신의 한마당”이었던 게다.

그리고 기량과 이론과 인간이 모두 익을 만치 익은 지금 도로 어린아이로 돌아가서, 어른이 사라진 전후 한국 사회에서 때이른 어른 노릇을 하느라 미처 누리지 못했던 색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색스럽고 야한 색을 쓰는데도 정념이 넘치거나 기운에 휘둘리지 않으며, 유치하고 촌스러울 법한 배색을 하는데도 세련되고 현대적으로 보이는 건, 진정 박서보만의 비밀이다.


Photo by Kim Kyungbum

박서보 레거시

그는 자신과 단색화의 동반자들이 남긴 당대의 레거시가 있다면, “그림을 수행의 수단으로 쓰고, 그 정신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양 사람들이 단색화가 뭐가 이쁘다고 사겠어요. 단색화, 단색화 하면서 대단하다고 하는 것은 서양미술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 서양미술은 내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우리는 내 생각을 접고 자연에 귀순하는 것이에요. 서양에서는 다 목적을 가져요. 우리는 무목적성에서 출발해 선에 도달하고 무를 이룩합니다. 단색화와 나의 시대가 남긴 유산은 그런 것이겠죠.

그러니까 색을 쓰고 안쓰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름이 좀 잘못 붙여졌는데, 서양은 다색주의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서 나온 것이고, 우리는 나를 비워냄으로써 아무것도 없는 것을 지향하다 보니까 우연히 우리 정신의 색인 흰색의 장에서 만난 것이죠. 전혀 세계관이 다른 겁니다. 이렇게 다른 짓거리를 하니까 서양이 자신들의 미술사에 없었던 작업을 편입시키기 위해 애쓰게 되죠.”

과거를 기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도 거침이 없고, 미래를 상상하고 설계하는 데에도 막힘이 없다. 올 겨울에는 이탈리아의 출판 명문 리졸리에서 라이프스토리와 도록을 겸한 집대성한 책이 나온다. 둘째아들 박승 이사장이 맡고 있는 기지재단과 박서보의 오늘까지 함께 해온 파트너 국제갤러리가 함께 기획하고 작업하는 책이다. 엉덩이 두드리며 키운 아들이 아버지를 기록하고 평가하는 데 게으르지 않으니, 박서보의 노년은 퍽이나 다복하다.

“리졸리는 우리 아들이 주도해 작업하니 더욱 기쁘고, 일반적인 화집보다 한층 공들여 만드는 것도 고맙게 여깁니다. 사진 한 장 한 장의 크레딧을 얻는 것까지 일일이 신경쓰고 있어요.”

한 번은 미술운동의 또다른 동반자였던 이우환 작가의 작품을 사용한다는 승락을 받으려고 직통전화를 걸었단다. 늘 곧바로 받던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어린 시절, 아이들끼리 서로 어울려 놀기도 했다는 그의 딸에게 연락하니 “쓰세요, 선생님이 쓰시는데 누가 뭐라 합니까.” 하고는 오후에 곧바로 파리에서 전화가 왔다고 했다. 이우환이었다.

“얼마든지 쓰십시오, 선생님. 걱정하지 마시고 쓰세요. 리졸리라니 아주 좋은 데서 나오네요. 축하합니다.”

젊은 시절 만난 뒤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바 없었던 이우환다운 축하였다. 참으로 단정했다.

이제 남은 것은 경상북도 예천과 서울 종로구 등지에 추진되고 있는 박서보미술관들의 건립을 보는 일이다. 고향 예천은 인구 5만의 소도시이지만, 기지재단의 기획으로 박서보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핵심 미술관으로 기능할 예정이다. 프리츠커 상을 수상한 건축가 피터 줌터가 설계에 참여할 것을 긍정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아직 지난한 정치적 설득의 과정들이 남아있지만, 행운은 늘 그의 편이었다. 서울 종로구립미술관은 박서보와 단색화 시절을 압축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 그밖에도 여러 도시에서 박서보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남다른 기획력으로 젊은 시절 비엔날레를 비롯한 미술행정가의 역할을 도맡았던 그는, 나무 하나라도 더 심고, 그림 하나라도 더 내주고 싶어 애를 태우고 있다. 노을처럼 무르익어가는 생의 풍경이다.

“내가 매일 14시간, 15시간씩 그리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몇 번 쓰러지고 난 다음에는 피곤하거나 몸이 안 좋으면 그림을 안그리거든. 그게 어쩔 수 없는 내 조건이고. 조심을 해야 한다고. 지금은 겨우 살아있다는 증거로 끄적끄적하는 거지. 틀림없이 이러다 꼴까닥하겠지.

정리를 잘, 하고 가고 싶어요. 정리가 돼 있으면 연구가 되지만, 자료가 없으면 연구대상에서 제외된다고. 에콜 데 보자르에 있는 김창열 작가의 아들이 내가 쓴 편지도 죄 복사해서 보내줬어요. 덕분에 연구자들이 우리 시대와 그림을 이해하기 조금 더 쉬워지겠지.”

아닌 게 아니라, 불과 두 달 전, 그는 넘어져 얼굴을 크게 다쳤다. 밤새 응급실에서 떨다 돌아와 다음날 성형외과에서 꿰매버렸다.

“내가 ‘늦게 데뷔한 탤런트요. 얼굴 이쁘게 꿰매주시오.’ 하니까 자기가 모르는 누가 왔나 하고의사가 한참 들여다봐요. 나는 그냥 장난을 치고 싶었지. 상처는 많이 아물었어요. 아직은 이 스웨덴제 테이프를 잘 붙이고 있으래. 변색 안되게.”

사회적 책임감에 짓눌려 오래 감춰두었던 장난꾸러기 소년은 시시때때로 튀어나와 자꾸만 놀자며 그를 부른다. 숨바꼭질하던 친구들이 모두 숨어버린 회춘에는. 어쩐지 뭉클한 데가 있다. 자꾸만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만다.

EBS 다큐멘터리의 홍보 트레일러에는, 분홍 봄꽃들을 배경으로 맺힌 데 없이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 얼굴을 오래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

인터뷰 중 전화를 걸어왔던 누군가의 고백이었다. 어쩐지 나도 그럴 것 같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