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박서보 : 봄날의 소년 1 / 이진주

2021-09-21


당대에 인정받는 법


“당대에 인정받는 세 가지 방법. 첫째, 다작한다, 둘째, 권력과 가까이한다, 셋째, 장수한다.”

 

누군가 SNS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자, 그와 친분이 있는 어느 기자가 댓글로 남긴 일갈이다.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고 불우하게 떠나간 천재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여럿 알고 있다. 그러나 이제 어떤 천재가 자기 시대에 발견되지 않기란 쉽지 않은 시절이 됐다. 재능이 있고, 그 재능이 우리를 설레게 만들거나 위로하는 한, 할머니든 할아버지든 세상은 끝내 찾아낸다. 그러니 시대가 몰라볼 것을 염려치 말고, 묵묵히 작업하며 그저 버티란 게다.


여기 구순의 화가 박서보가 있다.

나이 여든 다섯에 비로소 시장이 인정하는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영국 화이트큐브(White Cube, London)와 프랑스 페로탕(Galerie Perrotin, Paris) 같은 세계 최고 갤러리들이 극진히 예우하는 전속 작가이며, 한국 ‘단색화(Dansaekwha)’ 운동의 선구작이자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묘법(Écriture)’ 시리즈는 소더비(Sotheby’s)와 크리스티(Christie’s) 등 특급 옥션에서 수십억 원대에 거래된다. 불과 오륙 년 전까지만 해도 명성에 비해 그림 값은 낮은 화가라는 불명예를 감내하기도 했으나, 이제 그의 ‘성공’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다작하며, 장수하라”는 첫번째와 세번째 요건에 충실했던 덕분에, 때늦은 봄날을 누리게 된 것.

한편, 두번째 요건, 이른바 작가와 권력과의 거리는 예술의 사회참여를 둘러싼 미술계의 논쟁과도 통하는 이야기다. 1980년대 이른바 ‘민중미술’, ‘참여미술’ 진영은 앞 세대 ‘추상미술’, ’순수미술’ 전체를 거칠게 비판한 바 있었다. “민중미술 운동은 (중략) 서구 사조의 눈치를 보면서 삶의 현실과 무관한 작업을 하던 이른바 모더니스트의 음풍농월을 질타하는 계기였다.”는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의 평가도 그 중 하나. “선생들은 학교에서 추상미술을 가르치는데, 강의실 밖에는 걸개그림이 내걸리는 현실”은 양쪽 모두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다. 허나, 2013년 단색화를 학술적으로 처음 조명한 조앤 기(Joan Kee, 한국명 기정현) 미국 미시건대 미술사학과 교수의 의견은 다르다. “박서보의 묘법을 비롯해 단색화라 불리는 일군의 한국 추상미술은, 말할 수 없는 시대를 침묵으로 증언하는 형식”이었으며, “당대의 작가들은 정권의 ‘동원’에 불성실하게 임하는 등 체제에 저항했다”는 것(<Contemporary Korean Art: Tansaekwha and the Urgency of Method(Univ. of Minnesota Press, 2013)>, <From All Sides: Tansaekhwa on Abstraction(Blum & Poe, 2015)>. 일반적으로 ‘Dansaekwha’라고 표기하지만, 기 교수는 ‘Tansaekhwa’라고 쓰고 있다.). 한 때, 뜨거운 논쟁을 이끌었던 민중미술 역시 다음 세대의 비판을 받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섰고, 여러 겹의 세대 교체를 거쳐 지금은 다시, 박서보와 친구들의 시대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민중미술계 미술사학자 윤범모 관장이 취임한 2019년 바로 그 해, 생애 두 번째 회고전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2019년 5월 18일부터 9월 1일까지, 서울 제1, 2전시실)>전을 대대적으로 열었다.

물론, 박서보는 여든 다섯 이전에도 이미, ‘한국 현대미술의 아버지’ 혹은, ‘한국 추상미술의 대부’라 불리는 거인이었다. 그보다 앞서 ‘밀리언 달러 클럽’에 초대된 친구 이우환도, 김창열도, 그의 스승 김환기마저도, ‘아버지’나 ‘대부’라고까지는 불리지 못했다. 좋든 싫든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토대’를 만든 사람이었다.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장이 외면하든 말든, 그만하면 충분히 성공하지 않았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야망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다. 그가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은 스케일이 달랐다. 화단에 첫 발을 내딛은 스물 다섯, 첫 순간부터 박서보는 늘 세계미술계를 생각했다. “내수용”은 단 한 번도 그의 사이즈였던 적이 없었다.



선명한 동물성의 남자


사람을 타고난 기질이나 성향에 따라 동물성이나 식물성으로 분류할 수가 있다면, 박서보는 뭇동물 중에서도 틀림없이, 최상위 포식자의 지위에 놓일 것이다. 동란 중에 간신히 살아남은 청년은 평생을 자기 식의 전쟁을 치르며 보냈다. 아비를 무너뜨리고 넘어서야 비로소 무리들의 새로운 아비가 되는 신화 속 왕자처럼, 박서보는 1956년 고작 스물 다섯 나이로 ‘반국전’을 선언하며 재야의 리더로 나섰다. 전후의 살풍경 속에서, 고즈넉한 산하나 한복 입은 여인을 더 이상 아름답다 여길 수도, 말할 수도 없었던 자신의 세대를 대표해서다.

박서보 개인으로선 재학 시절부터 이미 여러 번 입선한 터라, 혼자서 안온한 길을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은 최전선에서 삶과 죽음을 경험한 대다수 청년들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수용하지도 못했다. “기존의 권위에 대항하여, 완전히 새로운 미학, 완전히 새로운 예술을 세우겠다”는 사자후가 단지 실력 없는 신세대의 치기에 그쳤다면, 그는 진즉 사라졌을 터였다.

반국전 선언과 한국 최초의 ‘앵포르멜(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행한 ‘비정형’ 추상미술 운동. 아카데미즘에 포섭된 기존 추상에 반기를 들었다.)’ 작가로 미술계에 각인된 뒤부터는, 쭉 변신의 연속이었다. 그가 만트라처럼 되뇌는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의 시기였달까. ‘원형질’, ‘유전질’ 시리즈의 모색을 거쳐, 묘법 연작을 통해 ‘한국 단색화의 기수’로 자리매김하는 동안, 그의 행보는 고스란히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가 됐다. 세계 무대에서 더불어 이름이 오르내리는 스승 김환기나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백남준, 그와 함께 당대의 추상미술 트리오로 활약한 이우환, 김창열과 달리, 박서보는 ‘지금/여기’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가장 첨단의 것, 독보적으로 고유한 것을 하는 현역 작가인 동시에, 한국 미술계의 중심이자 정점에서 오늘날의 ‘홍대 미대’를 만든 혁신적인 교육자요, 카리스마 있는 행정가로 화단을 이끌었다. 그러므로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박서보라는 이름 석자를 가리거나 지우기란, 끝내 불가능하다. 그의 삶과 그림은 현재진행형이다.



여전히 과소평가된 거인


그가 이룩한 성공에는, 한국의 전후 재건과 산업화 과정이 그러했듯,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적적인 데가 있다. 박서보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다뤄지는 방식은, 신화화와 우상 파괴, 재신화화 사이를 현기증 나도록 오간다. 2014년 영문판에 이어, 지난해 한국어로 평전 <박서보: 단색화에 담긴 삶과 예술(마로니에 북스, 2019)>을 쓴, 싱가포르 큐레이터 케이트 림(Kate Lim) 아트 플랫폼 아시아 대표는, “박서보는 아직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한다. “정치적 이유로 여전히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거다. 과연, 당대 최고의 평론가 이일부터 오늘날까지 박서보를 다룬 평론과 기사, 작가 자신이 손수 수집하고 기록한 거대한 아카이브를 보면, 이 거인의 삶이 한두 사람의 손으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인가 싶은 의문을 품게 만든다.

당장 먹고 사는 일조차 힘겨웠던 휴전 직후 한국에서, 미술이란 언감생심이었다. 세계 미술이라는 거대한 판 위에 한국 미술은 고작 한 점 포석으로도 놓여 있지 않았다. 미래를 설계하기는커녕 현재를 수습하기에도 급급했던 시절, 일신의 영달만이 아니라 전체의 구도를 그리려는 그의 선의와 상상력은, 너무 앞질러 놓인 알파고의 수처럼 종종 억측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그는 오해 받는 선각자의 숙명을 감수하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향해 나아갔다.

작가 자신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박서보의 그림에서 고요와, 명상과, 수신과, 치유를 읽고 가지만, 그런 평생이 진정 평화로웠을 리 없다. 소음이 없기를 기대하기란 역시 불가능하다. 현대미술가협회(현대미협) 설립부터 파리비엔날레 참가, 홍익대 예술학과 설립과 한국미술협회(미협),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활동에 이르기까지 박서보는 끊임없이 역을 맡고 일을 벌였다. 기라성 같은 원로 및 스승들과 싸웠고, 동료들의 수동적인 몰이해와 능동적인 오해를 견뎌냈다. 그 와중에 대중의 눈을 밝히고 설득해 마침내 시장에서도 살아남은 것이다.

이는 파리나 뉴욕이라는 현대미술의 최첨단 현장이 아니라, 재투성이 서울에 남아 일군 것이라 더욱 경이로운 성취였다. 왜소한 개인이 아닌 집단을 키워내고, 제자와 후배와 대중을 어떻게든 품어 안으며, 일본이라는 디딤돌을 한 발 딛고 변방에서 중심을 공략한다는 그의 전략은, 육십 년이 넘는 기다림 끝에 마침내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던 임제 선사의 가르침과 같이, “스승을 닮지 말고, 무리를 닮지 말고, (어제의) 나를 닮지 말라“고 제자들을 담금질했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저쪽에서 오는 것이 예술이든, 세계든, 그는 결코 피하지 않았다.

 

 

한없이 투명한 진심

 

우리 현대미술사를 다룬 책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인간 박서보는 곁에 있는 이들을 압도하고 질리게 하는 바 있었다. 그리고 모든 거인들이 그렇듯이, 거인의 우뚝한 자리 아래에는 그늘이 졌다. 이는 가장 친한 동료들이나 가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공개된 사진마다 모든 구도의 중심에 있었다. 눈에 띄게 둥글고 잘생긴 얼굴로 이쪽을 응시하거나, 상대방의 기를 죽이려는 듯 인상을 쓰고 있다. 때론 마음대로 파안하며 오만하게까지 여겨지는 존재감을 내뿜었다. 마냥 미워하기에는 너무 잘났고, 그렇다고 마냥 사랑하기에는 너무 무서운 사람. 그의 주위에는 적도 친구도 많았다.

그래서 더욱 역설적으로 그에게는 그림이 수행이나 구도의 수단이 되었다. 바로 여기에서 박서보라는 인물과 그의 작업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그에게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위선’으로까지 몰아 공격하는 지점이다. 하지만 박서보는 짐짓 위선을 시늉할 만큼 겸손한 이가 못된다. 그는 차라리 어린아이처럼 속이 투명하게 비치는 인물이다. 갖고 싶은 건 갖고,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이룬 것은 이뤘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케이트 림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박서보는 100점짜리 시험지를 자랑하는 어린아이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성질이 불 같은 양반이 수신하려고 그림 그린다 하면 못 믿는 사람도 많았겠어요.

“그런데 사실이에요. 옛날 선비들을 보라지. 벼슬을 하기 전까지는 누구나 학문을 사랑하고 순수하다고. 그런데 막상 입신해 국사를 논하다 보면, 평소 글을 읽고 존경했던 이들과도 입장이 달라져서 정쟁을 하지요. 사화를 일으키기도 하고요. 그러면 마음이 어떻겠어요? 집에 돌아와서 벼루에 한없이 먹을 가는 거에요. 들끓는 마음을 그렇게 다스리는 거지. 나도 꼭 그랬다고.”

 

박서보의 그림을 가리켜 ‘현대적 문인화’라 평하는 이도 있거니와, 그가 벼루나 만년필과 같은 ‘선비의 물건’을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구도란 다른 것이 아니다. 내면으로 향해 난 길을 걷는 것이다. 그를 둘러싼 외적인 세계가 아무리 시끄럽더라도, 안쪽의 한 점 진실을 들여다보는 것.

그의 집 거실에는 단원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조선조 명판서 구윤명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또 서재와 작업실 구석구석에는 완전히 하얀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아예 노란 것도 아닌, 희끄무레하고 고즈넉한 유백색 달항아리들도 여러 점 놓여있다. 중성적이고 모호한 색깔과 모양, 완벽해질 수 있으나 부러 마지막 한 끗의 완벽을 피한 상태의 달항아리들. 무신에 가까운 단단한 몸을 가진 사내가, 옛 문신의 얼굴을 아침 저녁으로 완상하고, 별 특별할 것 없는 도자기를 애지중지 어루만진다는 것이 의아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의 작품은 일부의 비판처럼 “한국의 전통이나 현실과 단절된 상태에서, 단순히 서구의 미니멀리즘을 수용해 번안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수천년 동안 쌓아 올린 서양미술과의 정면승부를 위해 가장 동양적인 것, 가장 한국적인 것의 정수를 찾아 연구한 결과였다. 희끄무레하고 거무튀튀하며 무어라 경계 짓고 정의 내릴 수 없는 색깔들을 만들어내고, 글씨인지 그림인지 모를 것을 그저 끝없이 무심하고 무목적적으로 그려 나가, 종국엔 자신의 이름과 존재마저 잊는 무념, 무상, 무명, 무아의 지경으로 향해가는 것. 그의 철학은 종교적 수신과도 맞닿는다.



박서보의 ‘묘법’, 사이 톰블리의 ‘칠판화’

 

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한 이른바 초기 묘법에는, 탄생 설화가 있다. 둘째아들 박승호(기지재단 이사장)가 아직 어렸을 때의 일이다.

 

“사랑이란 게 내리사랑이에요. 큰애한테는 잘못해준 게 많은데, 둘째는 마냥 귀여웠거든. 쪼끄만 게 지 형이 쓰던 방안지 공책에 글자를 따라 쓰려다가 그게 잘 안되는 거야. 몇 번 해보고, 지우고, 또 써보고, 종이 질이 안좋아서 지운 게 일어나고 번지니까 화딱지가 나서 그예 이이이익-하고 마구 그어댔겠지. 단념한 거지. 그걸 보고서 내가 배웠어요. 애초에 예술을 무슨 틀에다 가두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닐까.”

 

일상의 그가 폭발적 성정 때문에 때로 즉흥적으로 보이는 데 반해, 작업에 대해서만큼은 지독할 정도로 완성을 추구한다. 박서보가 처음 묘법을 시도했던 것은 1967년의 일이지만, 세상에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6년 뒤인 1973년의 일이었다. 그것도 이우환의 제안으로 일본 무라마츠 갤러리를 통해 먼저 소개하는 전략을 취했다. 과연 일본은 작업의 가치를 알아보고 열광했다. 묘법은 한국에서도 연착륙했다. 충분히 무르익어 스스로 작품세계를 방어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와 대구를 이루는 박서보의 또 다른 만트라, “변하면 또한 추락한다”를 의식한 것이었을까. 그는 어설픈 아이디어나 설익은 습작을 세상에 내놓는 걸 강박적으로 피했다. 예정된 전시를 무르고, 친구들에게조차 비밀로 하면서, 그리고 또 그려댔을 뿐.

이 숙성의 시기와 과정을 밝히는 것이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이유가 있다. 초기 묘법과 비슷하다고 논의되곤 하는, 미국 작가 사이 톰블리(Cy Twombly, 1928-2011)의 ‘무제’를 비롯한 이른바 ‘칠판화(blackboard painting)’ 연작들이 1966년에서 1971년 사이 주로 제작,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논쟁적인 이들은 박서보가 톰블리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공격하지만, 박서보가 기록하고 증언하는 진실은 다르다. 먼 나라의 톰블리가 아니라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 아들이 자신의 선생이었다는 것. 글씨 연습을 하다 체념하며 연필로 마구 그어버린 선을 본 딴 아버지는, 두텁게 쌓아 올린 달항아리빛 유화 물감 위에, 낙서처럼, 노동처럼, 비움으로써 채웠다.

하지만 인간적인 아쉬움까지 영 비워내지는 못했나 보다. 수백억 대에 거래되는 톰블리와 자신의 작품을 놓고, 박서보가 슬쩍 들려준 이야기다. 어느 세계적인 갤러리 대표가 그랬단다.

 

“제 방에 묘법을 걸어두고 매일 명상하듯 봅니다. 톰블리의 낙서와는 깊이가 다릅니다, 선생님.”

 

이 어린아이 같은 투명함마저 거인의 한 면모랄까. 발표 당시부터 수십 년 동안 “아이가 그린 낙서 같다” “내용이 없는 장난이다”라는 호된 비판에 휩싸였던 톰블리를, 그리고 실제로도 친구의 무등을 타고 재미난 놀이처럼 ‘낙서화’를 그렸던 톰블리를, 누구보다 자기 수양과 구도라는 테마에 진지했던 박서보가 굳이 모방할 이유도 없었거니와, 무엇보다 ‘무’에 다다르게 된 철학적 배경이 근본적으로 다를 터. 이럴 때는 변방의 화가임이 억울해질 만도 하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하거든. 내가 영어를 잘했으면 세상이 달라졌을 거여.”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