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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두 동강난 미술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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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두 동강난 미술계 

《동아일보》 1956년 10월 7일자 3면 관련 기사

 1949년 출범한 《대한민국 미술전람회(國展·국전)》는 일제 침략기의 조선총독부가 주관했던 《조선미술전람회(鮮展·선전)》을 본떠 만든 관전(官展)이었다. 처음에는 동양화 서양화 조각 공예 서예 부문으로 공모하였다. 심사위원들이 입선작을 선정하고 그 가운데서 특선을 가리고, 다시 그 중 대통령상과 국무총리상, 문교부장관상을 선정토록 했다. 문제는 심사제도였다. 일본에 유학한 작가들이 《국전》을 차지하고,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만을 선(選)에 올리는 구태를 거듭했다. 

 화단을 주도한 세력은 해방 후 설립한 ‘조선미술가협회’를 승계한 ‘대한미술협회(대한미협)’ 원들이었다. 출범 당시 회장은 ‘대한미협’을 창립한 고희동(高羲東, 1886-1965, 서양화·한국화·), 부회장에 이종우와 장발이 선출되었다. 1954년 3월 6.25 전쟁 이후 처음 열린 ‘대한미협’ 정기총회에서 장발을 배제하고 그 자리에 도상봉을 앉히자 장발이 내심 반발하며 불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장발은 서울대학 미술부가 1953년 미술대학으로 승격하고 초대학장에 오르자 서울미대를 철저히 단속하며 완전 장악에 성공하자 졸업생들을 동원해 고희동의 아성에 도전하기에 이르렀다.

 장발의 내부 단속이 얼마나 심했느냐 하면, 1954년 쯤 서울대 1학년생인 민경갑(閔庚甲, 1933-2018, 한국화)과 연지동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다 막 서울대 전임강사가 된 김세중(金世中, 1923-1986, 조소)을 만났다. 민경갑은 나를 형(兄)이라 부르며 잘 따라서, 자주 만나던 사이였다. 김세중은 안성 선배여서 자별하게 지냈다. 김세중은 친절하게 “왜 요즘엔 놀러오지 않느냐? 자주 놀러오라”고 당부까지 했다. 그런데 다음날 김세중에게 불려간 민경갑은 “왜 홍익대 애들하고 어울려 돌아다니느냐”는 질책과 함께 시말서를 썼다고 했다. 선이 굵고 통 큰 김세중에 적잖은 실망을 하면서도 장발 학장 아래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마침내 1955년 5월 8일 낮 1시 서울 종로구 수송동 숙명여중 강당에서 ‘대한미협’ 정기총회가 열렸다. 투표결과 ‘서울대파’의 장발이 사실상 ‘홍대파’가 미는 고희동을 간발의 차로 이겼다. 그제야 아무런 대비 없던, ‘대한미협’ 간부들이 당황하며 술렁였다.

 이때 제1회 《국전》에서 〈폐림지근방(廢林地近傍)〉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한 류경채(柳景埰, 1920-1995, 서양화)가 회칙 상 정족수 미달임을 밝혀내고 그 사실을 ‘대한미협’ 집행부에 보고했다. 투표는 당연 무효 처리되었다. 재투표에 들어간 결과 고희동이 명예회장에 추대되고, 위원장에 도상봉, 부위원장에 이종우 김인승(金仁承, 1911-2001, 서양화) 사무국장에 이봉상이 선임되는 임원개선을 이뤘다. 

 하지만 장발 측은 선거 결과에 불복하고 딴살림을 차렸다. 서울대 장발의 참모인 장우성(張遇聖, 1912-2005, 한국화)과 ‘대변인’을 자처한 김병기(金秉麒, 1916- , 서양화)는 회고담을 통해 전혀 당시 상황을 이야기를 했다. 물론 완전히 사실과 다르다.  꼭 밝혀 두어야 하겠기에 길지만 써야겠다. 두 사람 이야기가 같은 목소리지만 세부에선 조금씩 다르다.

 둘 중 최근 글인 김병기부터 읽어보자. 그는 1954년 서울대 ‘대우조교수’로 들어갔다. 본인은 ‘전임강사’라고 한다. 하지만 서울대 약사(略史)엔 대우조교수라고 나온다. 대우조교수는 3명 더 있다. 그해 임명된 전임강사는 서울미대 1회 졸업생인 조소과의 김세중과 회화과의 박세원(朴世元, 1922-1999, 한국화) 2명이었다. 

 “개표결과 과반수에서 한 표가 부족한 채 고희동 우세로 나타났다. 하지만 과반수 부족임에도 재투표를 하지 않았다. 윤효중은 그날 밤 기자들에게 일방적으로 ‘고희동 당선’을 발표해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하지만 장발파의 반발로 결국 고희동은 자진사퇴하면서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고, 도상봉이 위원장 자리를 차지했다.”(《한겨레》 2017년 9월 21일자)

 장우성은 훤씬 전인 1982년 《중앙일보》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 당시를 회고했는데 김병기보다는 약간 상세하다.

 “투표결과 고희동이 박빙의 차이로 이겼지만 정관상으로 충분한 득표가 아니었다. 과반수가 되려면 한 표가 더 있어야 한다고, 이른바 ‘서울대파’의 장발 참모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이 문제 때문에 심야회의를 열어 회칙 해석을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고희동의 일등 참모인 불재(弗齋) 윤효중이 이튿날 아침 신문에 〈대한미협 이사장에 고희동 당선〉이라고 발표함으로써 기정사실화해버렸다.”

 하지만 두 분 말씀은 다 틀렸다. 두 분은 그날 재투표가 없었다고 단정하고 있다. 하지만 재투표는 분명 이뤄졌다. 그리고 다음날 신문에 윤효중(尹孝重, 1917-1967, 조소)의 공작을 기정사실화됐다면 왜 바로 반박하지 않았을까. 당시 유력지인 《경향신문》과 《동아일보》의 5월 17일자 ‘대한미협’ 임원 개선 보도를 하자, 나흘 뒤인 21일에야 ‘한국미술가협회(한국미협)’ 총회를 열고 정식 발족했다. 또 유효중의 공작 운운하며 증거로 내민 《동아일보》 1956년 10월 7일자에도 양측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날 (류경채의 이의 제기로) 재투표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동아일보》 1956년 10월 7일자 1면. 파쟁으로 희생되는 국전에 대해 탄식하는 사설이 실렸다.